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보리스 옐친 (문단 편집) == 개요 == 러시아 연방의 초대 [[러시아 대통령|대통령]]. 1987년 인민대표회의 의원으로 선출된 이후에 급진 개혁파 정치인으로 명성을 얻었고, 1990년에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의 최고회의 주석으로 취임했으며, 1991년에 최초의 [[직선제]]를 통해 러시아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1991년에는 [[8월 쿠데타]]를 성공적으로 저지하면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의 실권자로 떠올랐으며 그 해 말 [[소련 해체]]를 주도하는 등 1991년부터 1999년까지 러시아의 대통령으로 재직하며 중요한 제도적, 절차적 정치 개혁 성과를 이룩했다.[* [[1991년 소련 국민투표]] 결과에서 보듯이 소련 국민들은 해체 반대 여론이 훨씬 높았으나 옐친을 비롯한 정치인들이 해체를 결정하였다.] 옐친은 개혁파 정치인으로 처음 등장하여 소련이 붕괴되기 전까지는 러시아 시민들 사이에서 열광적인 지지를 얻었으나, 1991년 독립 이후 경제개혁 실패, 최고회의 해산([[1993년 러시아 헌정위기]]) 등 무능한 모습을 보이며 국민들의 지지를 잃었다.[* 본문에도 설명되어 있듯이 러시아는 소련 말기부터 점차 민주화 작업에 착수해 1991년에는 최초의 직선제 대선을 치르었다. 옐친은 1993년 12월 국민투표를 통해 새로운 헌법을 채택, [[이원집정부제]] 국가로 개혁하는데 [[1993년 러시아 헌정위기|이러한 과정]]에서 러시아 의회를 포격하는 등 헌정위기를 초래하고 사상자가 나왔으며 러시아를 독재국가로 탈바꿈시켰다.] 특히 충격 요법으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 경제개혁을 추진하였는데, 국가주도의 소련의 경제의 절반이 러시아 정부에서 민영화되었다. 기업들은 줄줄이 몰락했으며, 예금 자산의 휴지화로 인해 대다수 일반인들은 빈민층으로 전락해버렸으며, 경제가 특정 산업에 편중되었기에 이로 인해 러시아는 1990년대를 통틀어 기나긴 불황을 겪어야 했다.[* 소련 때문에 물려받은 빚만 무려 1,300억 달러였고, 이러한 금액도 이자와 경제 개혁 과정 속에서 2,000억달러가 넘도록 계속 불어나게 되었다. 러시아는 유가가 오른 2000년대에 겨우 경제가 회복된다.] 이후 1996년 [[제1차 체첸 전쟁]] 패배, 1998년 러시아 [[모라토리움]] 위기 및 [[탄핵]] 시도로 정치적 입지가 땅에 떨어졌다. 이후 자신의 정치적 입지가 완전히 끝났음을 직감했고, 건강 문제까지 겹쳐 1999년 12월 31일 당시 총리였던 [[블라디미르 푸틴]]에게 대통령직을 넘기고 정계에서 은퇴, 2007년에 사망했다. 시기적절하게 후임 푸틴에게 대통령직을 넘겨 주었고, 푸틴과 [[통합 러시아당]]이 일당독재라는 비판을 들을지언정 지속적으로 정권 재창출에 성공을 거두면서 말년에도 존중받는 삶을 살았다. 대중들의 평이 어떻든간에 러시아 연방정부로부터 [[국부]] 수준으로 대접받아 왔기 때문에 퇴임 후에 러시아 연방정부나 [[통합 러시아당]], [[러시아 연방 공산당]], [[러시아 자유민주당]] 가릴 거 없이 최강국 소련을 망하게 만든 원수 취급에 푸대접하는 [[미하일 고르바초프]]보다는 나은 삶이기는 했다. 러시아인들이 옐친을 어떻게 생각하든간에 푸틴은 공석에서 옐친을 비하한 적이 없고 되려 옐친을 추모하는 의미에서 옐친의 이름을 붙인 문화센터가 개장되는 것을 보면 현재 러시아 연방정부 차원에서 옐친을 존중하는 기조가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많은 러시아인들은 옐친을 증오하기는 하지만 그와 별개로 푸틴이 옐친으로부터 대통령직을 승계받은 인물이고 옐친으로부터 이런저런 조언을 들으면서 대통령직 수업을 받았다. 또한 푸틴이 대통령직에 오른 이후로 옐친에게 면책 특권을 부여해 옐친이 감옥에 가지 않고 말년을 별장에서 편하게 보낼 수 있게 해 주었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격하를 시킨다면 정통성에 타격을 입을 게 불을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보리스 옐친은 북한을 비판하고 지원을 중단하였으며, 대한민국과의 역사를 바로잡고 관계를 개선하여 [[6.25 전쟁]] 기록물 전달,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 당시의 블랙박스 및 유품을 전달하며 사과했다. 또한 소련 시절 차관을 계승해 제대로 갚았다면 한국의 [[외환위기]]가 없었다는 비판도 있지만, 오늘날 [[불곰사업]]으로 이어져 한국의 [[방위산업체|방위산업]]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